금관가야(金官加耶)는 6가야(六加耶)의 하나로,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금관가야라는 이름은『삼국유사(三國遺事)』오가야조(五伽耶條)에 인용된『본조사략(本朝史略)』을 통해 알려졌다. 가락국(伽落國: 駕洛國)이라고도 했으며, 초기에는 여러 가야 중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大加耶) 또는 본가야(本加耶)라고도 불렀다. 또 지리적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가야(南加耶)라고도 하였다.
3세기 후엽에 쓰여진『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는 구야국(狗邪國)이라고 했으며, 왜인조(倭人條)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하였다. ‘구야(狗邪)’는 가야에 대한 한자 표기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龜何龜何 귀하귀하
首其現也 수기현야
若不現也 약불현야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라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는 하늘의 소리에 9족장과 부족들이 모여 기뻐 춤을 췄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구지봉(龜旨峰).
가야의 건국설화로 인하여 구지봉은 역사적인 봉우리로 자리 잡고 있으며,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상부에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남방식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5∼6개의 짧은 받침돌 위에 지름 2.5m 정도 되는 덮개돌이 덮여 있고 그 위에 한호(韓濩)가 쓴 것이라 전해지는‘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김해시의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져 있는, 봉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낮지만 어릴 때부터 놀았던 구지봉에 산책가면 역사가 되는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김해시의 모습을 내려보았던 날들이 이젠 어느새 추억처럼 날아다님을 전망대에 서서 들여다 본다.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 구봉 등으로도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 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간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황금알을 깨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 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백조아파트 길 건너편에서 국립김해박물관 주차장까지 이어진 부지를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조성한 후 많은 시민들의 걸음이 구지봉을 중심으로 오가면서 쉼과 사색으로도 좋은 가야사누리길에서 계절이 만들어준 운치에 맘 한자락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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