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자수첩 > 김해인물열전 #3 장유 출신 독립 애국지사 김승태(金升泰)

본문 바로가기
기자수첩

김해인물열전 #3 장유 출신 독립 애국지사 김승태(金.. _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유넷취재팀 작성일19-10-29 14:26 조회503회 댓글0건

본문

[포맷변환]독립운동가 김승태.jpg

 

과거를 모르면 건설적인 미래는 없다

 

 김해가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자취를 연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김해인의 자긍심을 고취함에 1차 목적으로 하고 김해의 후손들로서 오늘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선조들의 삶을 되짚어 보며 선조의 삶을 받들고 또한 반성해야 할 인물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자 본지는 전시회를 직접 찾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김해인물연구회자료를 기준으로 김해 인물들을 기획 연재하기로 한다.

 

 

 

김해인물열전 #3

 

장유 출신 독립 애국지사 김승태(金升泰)

 

김승태는 187866일 경남 김해군 장유면 용덕리 외덕 328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29일에 몰(歿) 하였다. 김해(金海) 김 씨(金氏)이며 1773년 절충장군(折衝將軍- 朝鮮時代 武臣, 正三品 堂上官), 충청감영중군(忠靑監營中軍)을 지낸 김려해(金麗海, 1740~1786)의 후손이다. 자는 시여(時汝)이고 호는 낙운(洛雲)이다.

 

김승태는 만세운동 이전까지는 명문가의 후손답게 지역의 유림(儒林)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유학자로서 를 실행하며 군자의 삶을 살았고 근동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다.

 

19193.1을 전후하여 이웃 마을 유하리의 김종훤(金鍾煊)이 고종의 국장에 참여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여기서 얻은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향하여 김승태를 찾아간다.

 

김종훤으로부터 서울의 동향을 전해 들은 김승태는 김종훤과 더불어 장유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한다. 김종훤이 김승태를 찾아가 만세운동을 모의했다는 사실은 당시 장유에서 김승태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919411일 김승태는 김종훤, 조순규(趙順奎), 이강석(李康奭), 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이후 김승태는 1919412일 장유면 무계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412일 김승태는 김종훤과 함께 동리 사람 50여 명을 동원하여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무계리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만세군 중들이 무계리 장터로 모여들었고 그는 대청천 언덕에서 김종훤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격렬한 시위 끝에 일경의 현장 발포로 3명이 순국하는 참사를 겪은 후 그는 체포되어 6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424일 석방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김승태는 한 치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함께한 동지들의 죄 몫까지 자신이 감수하려 했다고 전한다.

 

그의 어머니 조순남이 지은 내방가사에 그의 독립운동 행적과 관련된 내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내방가사에 따르면 김승태는 왕손으로서(여기서 왕손이라는 것은 수로왕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의연하고 늠름했으며, 국가를 걱정하고 임금께 충성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덕을 갖춘 선비였다. 그가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그의 이념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유교적 윤리의식이 바탕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만세운동으로 투옥이 되고 재판을 받는 중에서도 김승태는 당당하고 의연하게 기개를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의 굳건한 기개를 과시했으며 도도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설에 가까운 변론을 듣고 이웃사람들이 말 잘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 덕담을 건네는 대목에서는 달변가였음을 짐작게 한다. 나아가 그가 얼마나 국가관이 뚜렷하면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인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김승태지사는 선비정신으로 올곧게 다듬어진 인물이었으며 불의에 앞장서는 의인적인 면모를 갖추었던 인물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또 약자를 보호하고 대의적인 입장에서 벌어진 사태를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하려 했던 정의로우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와 포용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김승태의 인물 됨됨이는 감옥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이어진다. 용덕리(지금의 내덕 외덕) 일대에서 세거지를 형성하며 살았던 일가였기에 제법 넉넉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일부는 일제에 강탈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후손에게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김승태라는 인물의 인품과 사회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위민동락(爲民同樂) 또는 동지애(同志愛)적 가치관으로써 이웃 주민들을 대했으며 그로써 생을 영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해 장유에 남긴 김승태의 만세운동의 족적은 선비적 자질과 인품 그리고 애국심에서 발로된 것이다.

 

이에 김승태 애국지사는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다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창원대 교수 이홍숙

 

 

 

 

 

 

 

 

 

본지는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하며,  제휴기사,  홍보성기사  등 일부내용은 본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해인터넷신문과 장유넷/장유신문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터넷언론사 등록정보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아00028

제호 : 장유넷

등록년월일 : 2006-06-09

발행년월일 : 2006-06-09

편집인 : 박동현

편집인 : 박동현

사업자등록정보

주소 : (50989) 경상남도 김해시 번화1로84번길 34, 305호(대청동, 네오프라자)

사업자등록번호 : 615-81-44060

상호명 : 주식회사장유넷

TEL : 055-313-9924~5

FAX : 055-313-9922

E-mail : jsinmun@daum.net

웹하드 : 바로가기(jangyunet/3139924)

계좌번호 : 농협 817041-51-002964


Copyright © 2003-2012 by Jangyu.net All Rights Reserved.
* 장유넷의 모든 내용과 포맷의 저작권은 주식회사장유넷에 있으며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Since 1997. 07

40509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