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자수첩 > 김해인물열전 #2 한글에 바친 영(靈)과 육(肉) 한뫼(환산) 이윤재

본문 바로가기
기자수첩

김해인물열전 #2 한글에 바친 영(靈)과 육(肉) 한뫼(환.. _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유넷취재팀 작성일19-10-11 11:04 조회457회 댓글0건

본문

“과거를 모르면 건설적인 미래는 없다“

  

 김해가 배출하여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을 찾아 그들의 자취를 연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김해인의 자긍심을 고취함에1차 목적으로 하고 김해의 후손들로서 오늘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선조들의 삶을 되짚어 보며 선조의 삶을 받들기도 그리고 반성해야 할 인물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자 본지는 전시회를 직접 찾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김해인물연구회” 자료를 기준으로 김해 인물들을 기획 연재하기로 한다.
 
김해인물열전 #2
 
한글에 바친 영(靈)과 육(肉) 한뫼(환산) 이윤재
 

이윤재.jpg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국민으로 떳떳이 살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1929년 경신학교에서)

한뫼(환산)
 
선생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과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사신 분이다.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현 김해시 대성동) 출신인 그는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장성하여 신문학을 공부하였다.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해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 1921년 6월 중국으로 망명 그 곳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난다. 단재의 영향으로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근대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을 수용하고 우리나라 상고사에도 눈을 뜨게 된다. 1924년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근무 당시 수양동우회(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흥사단 노선의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우리말글의 보존을 위해 온 몸을 받쳤다.
 

한뫼이윤재.jpg

 
선생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민족사를 고취시켰으며, 지방 강연을 다니는 동안 학생들에게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다. 조선의 말글을 바로 아는 것이 곧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자주의식을 끊임없이 심어주었다.
 
선생은 조선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 일제의 우리말 탄압으로 갈갈이 찢어진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전(말모이) 발간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임을 인식하고 동지들과 함께 사전 발간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조선어사전 편찬이 일제의 감시와 주시경 선생의 급서, 김두봉 선생의 망명 등으로 기약 없이 늦어지자 선생은 1933년부터 직접 조선어사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선생의 원고는 해방 후 사위 김병제가 유고를 보충하여 『표준 조선말 사전』(1947)으로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출간되었다. 이 사전이 우리 한글사에 각별한 이유는 1957년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남한의 대표적인 국어사전 역할을 했다는 데에 있다. 이 큰 일을 선생은 고문과 구타로 피폐한 몸을 이끌고 오로지 홀로 해냈다.
 

표준한글사전.jpg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 반 옥고를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아 1942년 우리 독립운동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사건으로 다시 동지들과 함께 함경남도 흥원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선생에 대한 일제의 판결문을 보면 “일찍부터 한일합방에 불만을 품고서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기에 이른 자”라고 되어 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고문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함흥형무소 복역 중 순국하였다. 그때 선생의 나이 56세다.
 
 
1888년 12월 24일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에서 출생
1905~1906 김해공립보통학교 재학
1906~1907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1907~1908 김해공립보통학교 복교 (제1회 졸업)
1909~1911 김해합성학교 교사로 역임
1911~1913 마산 창신학교와 마산의신여학교에서 우리글과 국사 가르침
1915~1917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 재학
1918~1919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 재직 중 3.1운동 주도로 옥고 (1년 6월)
1921~1923 중국으로 망명, 신채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부경대학 사학과 입학
1922 흥사단 입단
1923 귀국
1924 정주 오산학교(교장 이승훈) 근무
1926 수양동우회에서 펴내는 잡지 『동광』에 「쾌걸 안용복」 발표
1927 조선어연구회 설립
1929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발기인
1930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1 조선어학회 창립
1933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
1934 진단학회를 창립,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 편집 및 발행 (11호~45호)
1937 수양동우회 회원들과 투옥 (1년 6월)
1942 9월 5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1943 12월 8일 옥중 순국 (향년 56세)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91 김해도립도서관에 선생의 흉상과 어록비 설치
2005 외동 나비공원에 기념조형물 설치

「김해인물연구회 김민주」
 
 
본지는 신문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하며, 제휴기사, 홍보성기사 등 일부내용은 본지의 공식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해인터넷신문과 장유넷/장유신문은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갑니다.
많은 관심과 제보 부탁드립니다.
 
김정선 기자(jsinmun@daum.net)
제보전화:055-314-555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터넷언론사 등록정보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아00028

제호 : 장유넷

등록년월일 : 2006-06-09

발행년월일 : 2006-06-09

편집인 : 박동현

편집인 : 박동현

사업자등록정보

주소 : (50989) 경상남도 김해시 번화1로84번길 34, 305호(대청동, 네오프라자)

사업자등록번호 : 615-81-44060

상호명 : 주식회사장유넷

TEL : 055-313-9924~5

FAX : 055-313-9922

E-mail : jsinmun@daum.net

웹하드 : 바로가기(jangyunet/3139924)

계좌번호 : 농협 817041-51-002964


Copyright © 2003-2012 by Jangyu.net All Rights Reserved.
* 장유넷의 모든 내용과 포맷의 저작권은 주식회사장유넷에 있으며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Since 1997. 07

40189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