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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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간 작성일10-02-10 08:47 조회1,855회 댓글0건 내용복사 즐겨찾기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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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간’. 제주에만 있는 이사 풍습이 만들어낸 말이다. 입춘 3일전까지 일주일을 신구간이라 한다. 신이 일년 동안의 활동을 쉬고 하늘에 옥황상제를 만나러 가는 시기이다. 이 때만은 제주라는 섬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온갖 신이 존재하는 곳이 제주이다. 그러다 보니 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비위를 잘못 건드리면 큰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는 제주사람들이다. 평소에 집을 옮기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슬쩍 이사를 한다. 약속이나 한 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이 때를 틈 타 나 역시도 이사는 못 갈지언정 집안 정리하는 일에 들어간다. 특히 버려야 할 물건을 찾아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정을 떼야 할 물건들을 고른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거나 냉정하지도 못해서 계획만큼 버리지 못한다.
낡아서 소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고민을 해도 떼지 못하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새것임에도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 있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거실에 있는 낡은 17인치 TV를 버린다고 마음먹은 지 몇 년째다. 작거나 디자인이 현대감각에 맞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채널이 3개로 제한되어 있어서 사실은 쓸모가 없다. 좁은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천덕꾸러기인 셈이다. 시커먼 색상이면서 잘 닦지도 않으니 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이번에는 큰맘 먹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채우리라 별렀다. 치울 요량으로 들었다 내려 놓았다를 몇 번 하다보니 웬걸 더 정이 들어 버린 느낌이다.
이 TV만은 내 15년의 세월을 빠듯하게 알고 있다. 화려한 결혼 생활을 꿈꾸다 평범한 소시민인 남편을 만나 시댁의 좁은 문간방에서 훌쩍이던 새댁의 마음을 보지 않았던가. 첫 애를 임신하고 입덧을 심하게 하면서도 먹고 싶은 음식 제대로 먹지 못하던 더운 여름날의 서러움은 어떠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차가운 시집살이까지도.
내 집 마련을 위해 나름대로 알뜰한 살림을 한다고 궁상도 많이 떨었다. 8천원짜리 청바지를 사면서도 몇 번을 망설여 오던 것을 남편인들 기억할까. 그러나 짠 눈물도, 소금이 되어 말라버린 가슴도 말이 없는 TV앞에서는 그나마 풀렸다. 유일하게 그 자리를 지켜 주면서도 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잔 고장조차 한 번 없다. 큰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짚고 일어서다 넘어지는 대형 사고 앞에서도 아이를 피해 주니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두 번의 이사를 거쳐 내 집을 마련하고 여유가 생기니 남편은 최신형 TV를 구입했다. 주말마다 TV없이는 못사는 남편인지라 새 물건은 남편의 주공간인 안방차지다.
이 때부터 낡은 TV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기능이 미약하여 존재가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가족들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구입하자고 말하지만 동의 할 마음이 아직은 없다. 물론 새것이 좋은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유를 따지자면 아주 사소하면서도 억지처럼 들린다.
좋고 나쁨의 차이를 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쌓아 온 얄궂은 정 때문이라고나 할까. 어떤 것이든 새것이 집이나, 내 손에 들어오게 되면 새것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문명의 혜택을 가볍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또 빈자리에 그대로 들어 올 수 없어서 다른 영역까지 넘보아야 할 때는 일이 커진다. 엉뚱한 것이 밀려나 버린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음은 물론이다.
난 아직도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 할 줄 모른다. 멀쩡한 수동 카메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딸아이가 조르는 바람에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는데 나에게는 몇 달째 무용지물이다. 도무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 딸아이한테 교육을 받고도 며칠 안 되서 까맣게 잊어버린다. 필름을 넣고 사용하는 카메라가 내 수준이다. 물질문명이 주는 혜택이 이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흔히들 말하는 기계치의 속사정이 이러한가.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가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치고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사실은 버겁기까지 하다. 몸과 마음은 천천히 움직이고 싶은데 문명의 속도는 예측불허다. 숨이 가쁘다. 편하자고 사용하는 물건들이 짐이 된다. 세대차이로 오는 벽은 높기만 하다. 적잖이 씁쓸하다. 유통기한이 빠른 물건들처럼 내 젊음도 바쁘게 나이 먹어가니 이 또한 서글프다.
이 번 신구간에도 TV를 버리지 못 할 것이 뻔하다. 그 자리에 들어 올 물건도 마련하지 못했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까지 존재한다. 그게 소망보다 미련에 가까우면 어떤가. 고작해야 아침 시간에 일이십 분 정도 뉴스를 전달하는 게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어쩌면 십년이 넘게 주부로 살면서도 배추김치 밖에 못 담그는 내 모양보다 나아 보인다.
또 내가 나이가 들어 안방 노인네가 되어서 수발을 받아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화장실 출입조차 혼자서 못하는 그 꼴을 어찌 이 TV와 비교 할 수 있으랴. 행여 몹쓸 병에 걸려서 몇 년을 병원 신세를 지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가족들 편하자고 누구나 다 안락사를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똑 같은 존재가치가 묻어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래서 무의미한 생명연장 의료 행위일망정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어느새 중고 TV는 내 얼굴과 닮아가는 느낌이다. 아무리 닦아도 빛이 안나니. 아마 내 손으로 TV를 사망신고 시키는 일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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